작가노트

이 작업은 한 권의 책을 한 점의 회화로 만드는 것이다.

내 작업에 쓰이는 책들은 주로 예전부터 수집해오던 사진집 등을 이용한다. 그것이 작업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이유는 기존의 수많은 시각이미지들 중에서도 사진집은 출판이란 과정을 거치며 엄선된 고급 이미지들이며 선명한 화질과 정교한 인쇄술의 결합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보기 힘든 장소나 접하기 쉽지 않은 물건 또는 생물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촬영하고 편집한 한 컷, 한 컷은 선별할 필요 없이 내 그림의 재료로써 이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베껴 쓰는 것처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수많은 사진들을 기록하듯이 화면 위로 옮긴다. 책에서 그림으로의 이미지의 이동 과정은 단순하게 묘사를 통한 도판의 재현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 정렬된 레이아웃을 무너뜨리고 캔버스 위에서 재배치의 과정을 거쳐 책의 재현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페이지 속에서 낱개의 도판이 지닌 본래의 텍스트와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무의미화 시키며 새로운 풍경으로 조합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결과물은 제작과정 속에서 스쳐간 수많은 시각정보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며, 한 권의 책 속에 숨어있는 이미지들의 관계를 발견하고 감춰진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다. 이것은 사물을 상이(相異)한 심미적 관점으로 보려는 시각의 확장을 통해 잠재된 미지의 세계를 가시화하려는 시도이다.

한편 사진집은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속적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화면을 채워나가는 방식은 나에게 일정한 작업의 규칙이 되어 다양한 것들을 그려보게끔 한다. 다음페이지를 넘겼을 때 예상치 못한 이미지가 나오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듯 화면에 그려 나가는 것은 주어진 이미지에 대한 상상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그리기 자체에 더욱 몰두하게끔 하는 장치가 된다. 또한 책의 완결이 곧 그림의 완결이 되어 한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고 이런 노동집약적인 수작업은 하나의 화면에 많은 에너지를 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 결과로 인한 화면 속 빼곡히 쌓인 이미지들의 응집은 내 안에 축적된 감각과 감성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책의 방대한 정보량의 압축과 펼침을 통해 필력을 표출시킴과 동시에 내재시키는 것은 그리기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자 수련이기도 하다.




These paintings are a pictorial manifestation of a book.

I usually use collections of photographs I have been collecting for my work. The reason for using photography books is that it has superior image quality through the publication process. Each of these professionally taken and carefully edited photographs of inaccessible places and nature is the perfect source for my painting for there is no need for selection. So I paint the contents of the photograph book from cover to cover just like a manuscript. The process of transferring the photographs onto paintings is not only the representation of an art work through simple description but also the transformation by breaking the layout and depicting the book through rearrangement. Through this process of rearrangement, the original meanings of the contents such as texts and images of the book are no longer valid and the painting itself becomes the new representation of these scenes. These reconstructed products are the results of recording of visual memory acquired through the process, finding the hidden meanings and relationships among the images, and building topography of these hidden meanings. This is an attempt to visualize the unknown through the extension of perception that is limited to identifying the aesthetics of the objects.

Also photography book provides various images continually while I’m painting. And the method of filling the canvas by turning over the leaves of a book becomes a certain rule and this makes me draw various things. No matter what unexpected images come up on the next page, working on the canvas as if solving problems makes me immersed in my painting without imagination. Also finishing a book becomes the completion of painting and it takes many efforts. This intensive manual work is a means to put enormous amount of my energy onto the canvas. The condensed images produced on the canvas are thought to be different manifestations of senses and emotions inside me. This embracement and expression of my artistic force through the condensation and expansion of a vast amount of information is a challenge, and also a discipline for my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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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글.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허수영은 한 권의 책에 있는 이미지들을 한 장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일단 그 발상이 흥미롭다. 화면을 촘촘히 메운 이미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작성된 고문헌이나 경전의 필사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면 그냥 무작정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떤 계획을 세워 화면의 이미지들을 구성했다기보다는 책을 넘겨가면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화면에 담아낸 듯하다. 책에 있는 이미지는 화면 속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불러온다. 허수영의 이러한 작업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이 짧은 글에서는 몇 가지 관점 - 체험적 이미지, 응축과 과잉, 전일적 이미지, 질서와 무질서, 과정의 이미지 - 에서 간략하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체험의 이미지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에는 많은 이미지가 실려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앞서 본 이미지는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혹은 본다는 것)은 기억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허수영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발생하는 이러한 체험적 이미지를 기록한다.

응축과 과잉
책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화면 속에 응축되어 있기에 한편으론 이미지의 과잉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이미지의 응축과 과잉이 공존하는 허수영의 그림은 의외로 상당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러기에 전시를 할 경우 무척 큰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회화적 에너지는 몰입을 유도하기도 하고, 또한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를 모르게 만들기도 한다.

전일적(holistic) 이미지
허수영의 그림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책에 있는 그림이나 사진들을 다시 그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수영은 단지 다시 그려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별적 이미지들이 화면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맺기 때문이다. 허수영의 이미지는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holistic)으로 드러난다. 한 장의 그림에는 책의 모든 이미지들이 유기적 관계 속에 녹아있다.

질서(cosmos)와 무질서(chaos)
허수영의 회화에 나타난 이미지는 질서가 있는 듯도 하고 무질서한 듯하다. 왜냐하면 질서 속에서 무질서,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환기되기 때문이다. 아폴론적인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무질서가 상호 교차하는 화면이다. 여기에는 딱히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도 찾아볼 수 없고, 특별히 구조가 중요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분명 이미지가 있지만 손을 내밀어 그 이미지가 무엇인지 포착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이는 물고기 떼를 보고 다가서는 순간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의 이미지
허수영은 책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이 무의미한 반복은 아니다. 과정의 의미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 속에 깊이 침잠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수영의 회화에 나타난 이미지는 결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이미지다.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을 통째로 한 화면에 재현하고 있는 허수영은 책의 연속적인 이미지를 응축된 과정의 이미지로 표현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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